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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전진하는 페미니즘

by 김고미🐻 2019. 12. 11.

낸시 프레이저의 <전진하는 페미니즘> 2부: '정체성의 시대, 분배에서 인정으로'를 정리한 노트입니다. 2부에서는 초기 제2물결 페미니즘에서 ‘정체성의 정치’로 이동하던 당시의 지형도를 담고 있는데요. ‘인정’에 대한 요구가 핵심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추적하며, 20세기 말의 해방적 비전이 위축되는 과정을 진단합니다.


상징계주의에 대한 반론: 페미니즘 정치를 위한 라캉주의의 용도와 남용 

낸시 프레이저는 이 장에서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자크 라캉의 상징질서이론을 페미니즘적 목적에 끌어오는 과정과 효과를 비판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왜 페미니스트들이 라캉에게서 비롯된 담론이론 해석과 줄리아 크리스테바에게서 비롯된 관계이론들에서 벗어나야하는지에 대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먼저 담론 이론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첫째, 담론 이론이 페미니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둘째, 페미니즘은 담론 이론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는 담론 개념은 정체성, 집단, 헤게모니를 검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담론투쟁을 만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차원에서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담론 개념은 복잡한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사회 정체성을 이해하도록 하며, 따라서 젠더정체성을 정태적이고 단일한 변수로 이해하는 본질주의적인 입장을 탈신비화한다. 집단 형성, 이를테면 ‘젠더 형성’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집단 형성은 사람들의 사회적 정체성 변동과 분명한 관련이 있고, 따라서 사회적 담론과 그들이 맺는 관계와 관련이 있다. 기존의 정체성은 담론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뚜렷한 특징과 중심을 획득하게 된다. 즉 사회집단의 형성은 사회적 담론에 관한 투쟁으로 인해 추진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담론 개념은 사회문화적 헤게모니와 연관을 맺는다. ‘헤게모니’는 그람시가 권력의 담론적 면모를 표현하려고 만든 용어다. 헤게모니는 사회의 ‘상식’ 혹은 ‘의견’을 확립하는 권력이며, 담론 속에서 지배적인 사회집단의 유리한 위치를 표현한다. 이것은 사회적 정체성과 사회집단을 사회적인 불평등의 견지에서 재조정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의 이해는 담론 개념이 페미니즘 이론화에 있어 담론 자체가 끊임없이 성취되고 경쟁하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어 프레이저는 어떤 담론 개념이 페미니즘 이론화에 유용한지 밝히고자 한다. 그는 라캉-소쉬르로 이어진 구조주의 모델과 푸코, 바흐친, 부르디외 등이 옹호한 화용론 모델을 비교하고 구조주의 접근법은 페미니즘 이론화에 있어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박에 없다고 비판한다. 

소쉬르는 의미화를 랑그와 파롤로 분리하며, 랑그를 주요한 대상으로 파롤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파롤의 추상화는 실천, 행위자, 발화주체의 문제 역시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구조주의 모델은 사회적 정체성과 사회집단이 형성되는 담론적 실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셈이다. 또한 통시적 접근을 부차화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정체성과 연대감의 변동에 대해,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사회적 맥락을 추상화하기 때문에 권력과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괄호로 묶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이 모델은 언어적 의미의 자원을 하나의 단일한 상징세계로 이론화하기 대문 에 사회적 의미들이 서로 긴장하고 갈등한다는 점을 부인한다. 요약하면 담론을 ‘상징체계’로 환원함으로써 구조주의 모델은 사회적 행위자, 사회적 갈등, 사회적 실천을 솎아내 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라캉주의’에 대한 비판을 연결시킨다. 얼핏 보면 신구조주의적 라캉주의는 페미니즘 이론화에 상당히 유리할 것처럼 보인다. 즉, 젠더화된 주체성에 관한 프로이트 문제 프레임을 소쉬르적인 구조주의 언어학 모델과 결합함으로서 전자는 후자에게 정체성, 발화, 사회적 실천을 제공하고, 후자는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를 담론적으로 구성된 젠더정체성으로 보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라캉주의가 생물학주의를 심리학주의로 대체했을 뿐 상징질서를 남근중심주의로 보고 있다는 점을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비판한다. 라캉주의의 주장은 절반이 심리학주의, 절반은 상징계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상징계주의란 의미화 실천의 다양한 물 신화를 단선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상징질서’로 균질화하는 것이며, 상징질서에 독점적이고 무한한 인과의 힘을 부여함으로서 사람들의 주체성을 단번에 고정하는 것이다. 라캉주의적 설명은 사실상 남근 유무의 단일한 축을 따라 이항대립적으로 정체성을 구분한다. 또한, 시간에 흐름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정체성 변동을 설명해 줄 수 없다. 모든 담론 영역의 불확실성은 리비도에 의해서 위협받고, 또 리비도 충동과 결합된 상징질서의 효과에 의해 고착된다. 그렇기에 라캉주의는 사회적 정체성, 사회집단, 헤게모니의 문제를 이론화하기에 개념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반면 프레이저는 화용론 모델이 페미니즘 이론화에 여러 가지 잠재적 이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화용론 모델은 담론을 우연적인 것, 복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역사적 맥락화와 의사소통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또한 의미화를 재현이라기보다 행동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자에 관심을 가진다. 더불어 화용론 모델은 담론연구를 사회연구로 연결하기 때문에, 권력과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게 해준다. 즉, 화용론적 접근은 사회적 정체성의 복합성, 사회 집단의 형성, 문화적 헤게모니의 획득과 경쟁,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과 현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로 저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들고 있으며, 그가 구조주의자에서 화용론적 대안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라캉주의에 휩쓸려 그 가능성을 지속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크리스테바는 구조주의 기호학이 언어를 상징체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대립적인 실천과 변화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비판하고, 의미화 실천과 발화주체라는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강제된 규범을 위반하고 혁신을 초래하는 실천이 이어질 수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몇 가지 징후는 후기의 크리스테바가 라캉주의에 빠지게 됨을 보여주게 된다. 크리스테바는 위반과 혁신 그 자체를 안정화하고, 미학적 실천과 위반을 등가치로 안정화하고, 이론화에 대한 첨가적인 접근법을 실행함으로써 라캉주의를 끌어들이게 된다. 라캉주의적 의미화 실천 분석은 크리스테바 이론의 화용론적 의도를 배신한다. 화용론적 실천을 기호계와 상징계라는 구성요소로 해체해버리고, 상징계는 물화되어 남근중심주의적인 상징질서로 나타나며 기호계는 대안이 되지 못하는 일시적 위반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프레이저는 담론 개념이 화용론의 많은 장점을 포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크리스테바의 분열된 발화주체(상징계의 주체와 기호계의 주체) 중 어떤 쪽도 페미니즘 정치의 행위자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집단적인 행위자를 구성하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고 말한다. 크리스테바는 페미니즘 운동을 분석하면서 여성의 여성성을 모성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강조한 후 그걸 뒤집어 ‘여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적 정체성은 허구이며 페미니즘 운동은 종교적이고 원형적인 전체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를 프레이저는 본질주의에 따른 여성중심적 계기를 반본질주의에 의한 유명론적 계기로 교체하면서 끝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화용론 모델은 페미니즘 이론화에 있어 구조주의적 접근보다 훨씬 유용하다. 복잡하 고 변화하는 담론 개념은 본질주의와 유명론이라는 함정 사이에서, 여성성의 전형 아래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을 물화하는 함정과 여성성을 철저히 해체해 무화하고 망각하게 만드는 함정 사이 에서 페미니즘 이론을 보다 안전하게 항해하도록 해준다.


인정의 시대 페미니즘 정치: 젠더정의에 관한 이차원적 접근 

이 장에서 프레이저는 70년대 신좌파로부터 출현한 제2물결 페미니즘이 90년대 문화주의적 선회를 거쳐 분배의 정치에서 인정의 정치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경제주의가 그저 문화주의로 대체되었음을 지적하고 인정투쟁과 분배투쟁을 결합한 페미니즘 정치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이후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두 가지 삼각형 모델로 향하는 과도적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프레이저는 이차원적 젠더 개념화를 제시한다. 말하자면 분배의 차원과 인정의 차원이라는 이차원적인 범주화를 통해 젠더를 보자고 요청하는 것이다. 분배의 관점에서 젠더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에 근거하고 있는 계급과 유사한 차별화 형태로 나타난다. 인정의 관점에서 젠더는 사회의 지위질서에 근거한 지위 차별화 형태로 나타난다. 전자가 성별노동분업, 생산과 재생산 문제 등을 다룬다면 후자는 법, 정책, 일상생활에 스며든 권리 차별을 다룬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분파주의적으로 다루거나 지배-종속적으로 다루지 않고 이를 결합한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내려진 정의의 개념은 또한 이차원적인 정의의 개념이다. 

특히 프레이저는 참여동수parity of participation 원칙을 핵심으로 하는 정의의 개념을 내세운다. (‘프랑스식’이라고 부르는 의회적 참여동수제도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 이 원칙에 따르면 정의란 한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 대등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적 장치를 요구한다. 참여동수가 가능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물질적 자원의 분배는 참여자들의 독립성과 발언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둘째, 문화적 가치의 제도화된 패턴이 모든 참여자에게 똑같이 존중을 드러내고,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야한다. 프레이저는 이 접근법이 제안한 젠더개념에 적합하며, 젠더부정의를 밝혀내고 비판하는데 이바지한다고 말한다.

한편 저자는 제시한 젠더 개념을 통해 인정의 정치를 정체성의 정치의 한계로부터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체성 모델은 성차별주의의 심리적 결과에 관련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지만 두 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 여성성을 물화하고 종속과 얽혀 있는 다양한 축들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모델은 종종 지배적인 젠더 전형을 재활용하는 한편, 분리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을 촉진한다. 둘째, 정체성 모델은 성차별주의적 불인정을 독자적인 문화적 훼손으로 취급한다. 즉 불인정과 불평등 분배 간의 연관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성차별주의의 두 가지 측면과 동시에 투쟁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제안된 젠더와 정의 개념에서 인정은 사회적 지위의 문제라고 밝힌다. 인정이 요구하는 것은 여성적 정체성이 아닌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완전한 파트너가 되는 여성의 지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인정은 여성성의 폄하와 왜곡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위 모델에 바탕한 성차별주의적 불인정은 제도화된 문화적 가치를 통해 이어져 나가는 종속적인 사회관계다. 불인정을 해소한다는 것은 여성성을 안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속을 극복하려는 것이며, 사회생활에서 남성과 대등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완전한 파트너로서 여성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젠더평등을 훼방하 는 남성중심적인 가치 패턴을 탈제도화해 젠더평등을 강화하는 가치 패턴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지위 모델은 인정에 관한 비정체성주의 정치가 가능해지도록 하며, 젠더 뿐만 아니라 인종, 섹슈얼리티, 종족, 국적, 종교를 포함한 종속의 다른 축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젠더 개념을 ‘인정 없이는 분배도 없다. 분배 없이는 인정도 없다’는 말로 정리한다. 그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관심사가 문화주의적 페미니즘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보는 주장을 반박하고, 분파주의가 초래한 맹목을 극복하고 포괄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인정으로의 이동이 분배정의의 문제 프레임을 억압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부추길 위험이 있는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통찰을 이어가면서도 문화주의적 선회로부터 배우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애중심주의, 불인정, 자본주의;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반론

이 장에서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가 제시한 이성애중심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비판하고 자신의 이론과 비교,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일단 버틀러가 ‘신보수주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신을 뭉뚱그린 것에 대해, 즉 성적 억압을 계급 억압에 비해 부차적으로 본다는 관점에 대해 오히려 계급의 정치로부터 소위 ‘정체성의 정치’를 서로 분리하는 현재의 흐름을 후-사회주의적 조건으로서 인정하고 이성애중심주의 억압의 개념적 불환원성과 LGBT 요구의 도덕적 합법성 양쪽 모두를 현실적 과제로 설정했다고 밝힌다. 

저자는 불인정을 심리적 상태가 아닌 제도화된 사회적 관계로 보며, 불인정을 불평등 분배와 결합되든 아니든 부정의라고 보고 있다. 버틀러는 지위와 계급이라는 유사베버적 이원론을 사용하고 있는 저자의 방법론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일원론으로 착각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이성애중심주의의 탄압이 초래한 문제의 심도와 심각성에 대해서 버틀러와 의견이 같지만, 버틀러가 ‘유물론적/문화적 구분’이라는 개념으로 이성애중심 주의와 자본주의 사회 특성 간의 관련성을 분석한 부분에 대해선 입장이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버틀러는 프레이저의 분배/인정 프레임에 반대하는 세 가지 주요한 이론적 주장을 하고 있다; 첫째, 게이와 레즈비언이 겪는 물질적/경제적 피해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억압을 불인정 만으로는 제대로 범주화할 수 없다. 둘째,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성애규범적인 규제는 ‘정치경제의 기능에 핵심적’이며 그 규제에 대한 우리 시대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 가능성을 위협’한다. 셋째, 유물론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구분은 불안정하고 사회이론에서 피해야 할 시대착오이다. 프레이저는 이 세 근거가 설득력이 없으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충분히 고유하고 역사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먼저 버틀러는 불인정의 부정의는 반드시 비유물론적이고 비경제적인 것이라고 가정한다. 프레이저는 제도적인 것의 물질성을 예로 들며 동성애 주체를 비체로 만드는 자격과 인간성의 문화적 구성물이야말로 이 제도적인 것들이며 불인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또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성애규범적인 규제가 정치경제의 기능에 핵심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개념정의적 논증으로도 기능주의적 논증으로도 득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기능주의적 주장, 즉 자본주의는 강제적 이성애를 필요로 하고 이를 통해 잉여가치를 확장하며 그렇기에 이성애중심주의에 저항하는 LGBT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 가능성’을 위협한다는 점에 대해 비판한다. 이에 대해 프레이저는 오늘날 LGBT 운동의 주요한 반대세력은 다국적기업이 아니라 종교적/문화적 보수주의자라는 점을 든다. 오히려 이들의 경제적인 문제는 자본 주의에 내장된 것이 아닌 인정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성애중심주의의 효과라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버틀러가 70년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잔재에서 가장 나쁜 것, 즉 자본주의 사회를 과잉총체화하여 억압의 일원론적 체계로 파악하는 점을 부활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능주의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점에 대해 저자는 버틀러의 세 번째 주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버틀러는 분배와 인정에 관한 프레이저의 규범적 구분이 유물론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에 바탕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렇기에 이 구분이 해체되면 분배/인정의 발판도 무너진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프레이저의 관점에선 불인정의 부정의 또한 불평등의 부정의만큼 물질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존재론적 구분이라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프레이저는 문화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구분, 즉 사회이론적 구분을 하고 있다고 말한 다. 한편 버틀러는 모스와 레비스트로스를 인용하여 교환의 원초적인 과정을 유물론적/문화적 분리선 어느 쪽에 할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프레이저는 그 논증에서 버틀러가 근대 자본주의 의 핵심적인 차이를 역사화하는 점을 빠트렸다고 말한다. 버틀러가 경제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탈안정화한’ 것으로 읽어내는 것은 전-자본주의의 특수한 특징을 근대 자본주의에도 적용한다는 점, 차이를 역사화하는 것이 사회이론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읽는다는 오류를 범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프레이저는 오히려 역사화는 해체론이나 탈안정화보다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과 차별화를 이해하도록 해주며, 반기능주의적인 계기와 대항체계적인 행위성, 사회변화의 가능성 또한 열어준다고 말한다. ‘재의미화’나 ‘수행성’과 같은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언어의 속성이 아닌 오히려 특수한 사회적 관계의 구체적인 모순을 읽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차별화되는 관점으로 볼 때 우리는 격차, 지위와 계급의 비동형성, 복수의 사회주체에 대한 모순적인 호명, 사회정의에 대한 투쟁으로 나가게 만드는 무수히 복잡한 도덕적 요청을 자리 매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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