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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정치를 위한 선언

by 김고미🐻 2019. 12. 9.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정치를 위한 선언
#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알렉스 윌리엄스, 닉 셔니섹
Alex Williams and Nick Srnicek

 

01. 서론: 당면한 사태에 관하여

1. 21세기의 두 번째 십 년을 시작하며, 지구 문명은 새로운 유형의 대격변을 맞고 있다. 다가오는 이 재앙들은 국민국가의 탄생, 자본주의의 발흥, 그리고 전례 없던 20세기의 전쟁들이 만들어낸 정치의 규범과 조직적 구조들을 비웃는다.

2. 가장 심각한 것은 지구 기후 체계의 붕괴다. 이는 머지않아 현재 세계 인구의 존속을 위협할 것이다. 기후 문제는 인류가 직면한 위험 중에서 가장 중대한 사안인 한편, 보다 덜 위협적이나 잠재적으로는 이처럼 불안정성을 가져올 문제들이 이와 병존하며 또 교차한다. 말기에 이른 자원 고갈, 특히 물과 에너지 보존 자원의 고갈은 대량 기근, 경제적 패러다임의 붕괴, 새로운 열전과 냉전 들을 예고한다. 계속된 금융 위기로 인해 각국의 정부들은 긴축, 복지 사업 민영화, 대량 실업, 임금 정체 같은 정책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정부를 마비시키는 악순환의 정치로 이어졌다. 생산 과정의 자동화 증가ㅡ'지적 노동'을 포함한ㅡ는 자본주의가 지닌 세속적 위기의 증거로, 곧 북반구의 중산 계급조차도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3. 끝없이 가속하는 파국들과는 달리 오늘날 정치는 무능력에 갇혀있다. 다가오는 소멸적 상황에 맞서 이를 해결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새로운 아이디어와 조직 방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위기는 힘과 속력을 얻고 있는 반면, 정치는 시들고 후퇴한다. 정치적 상상력이 마비되면서 미래도 함께 소실되고 있다.

4. 경제적 선진국에서 여러 방식으로 발견되듯, 1979년 이래 전지구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는 신자유주의에게 있어왔다. 새롭게 제기되는 전지구적 문제들이 신자유주의에 심각한 구조적 도전ㅡ가장 가까이는 2007~2008년 이후 신용, 금융, 재정 위기ㅡ을 가해옴에도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심화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기획의 지속,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2.0은 또 다른 구조적 조정들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사민주의적 제도와 서비스로 남아있던 것들에 대한 민간 영역의 새롭고 공격적인 침투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이 정책들이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경제적·사회적 효과를 가져오고,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전지구적 위기에 근본적인 저해를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5. 우파 정부, 비정부기구, 기업 권력이 신자유주의를 이토록 밀어붙일 수 있던 건 좌파로 남아있는 것 대부분의 지속적인 마비와 무능력한 특질에도 일부 이유가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속된 30여 년은 대부분의 좌파 정당이 급진적인 사상을 상실하도록 했고, 그들을 공허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인민에게 권한을 부여받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좌파 정당들은 전후 사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최적의 조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케인즈주의적 경제로의 회귀를 요청함으로써 현재의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그런 명령이 있다고 해도 우린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 노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의 도그마에 저항한 그들의 능력에 고무되긴 하지만, 남미 볼리비아식 혁명의 신사회주의 정권들조차도 20세기 중반의 사회주의를 넘어설 대안으로 발전하지 않는 점에선 실망스럽기만 하다. 조직화된 노동은 신자유주의 기획이 만들어낸 변화로 구조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제도적 수준 정도로 경직되어 ㅡ기껏해야ㅡ 새로운 구조 조정을 약간 완화시킬 수 있을 정도일 뿐이다. 새로운 경제를 구축하기 위한 체제적인 접근 없인, 또 이런 변화를 밀어붙일 구조적 연대 없인 노동은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냉전이 끝나고 일어난 신사회운동이 2008년 이후 다시 나타났지만, 그 또한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적 전망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대신 이들은 전략적 유효성보다 내부의 직접민주주의 과정이나 정동적 자기가치증식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고 있으며, "진정성" 같은 허약하고 덧없는 공동체적 즉물성으로 세계화된 자본의 추상적 폭력에 반대한다며 신원시주의식 지역주의 따위를 주창하곤 한다.

6. 급진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조직적, 경제적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우파가 쥔 헤게모니 권력은 어떤, 아니 모든 증거에 맞서더라도 그들의 편협한 상상력을 계속 밀어붙일 수 있도록 해준다. 좌파는 기껏해야 최악의 급습들 가운데 몇 가지에 부분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조류에 저항하는 크누트1)가 될 뿐이다. 즉 전지구적으로 새로운 좌파 헤게모니를 만들어내려면 가능한 미래를 상실에서 복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말로 미래 그 자체를 복구해야만 한다.

 

 

02. 공백기: 가속주의자들에 관하여

1. 어떤 체제가 줄곧 가속이라는 아이디어와 관련되어 왔다면 그건 바로 자본주의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사작용에 경제 성장은 필수적이다. 경쟁 우위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통해 자본주의 개별 주체들 간의 경쟁은 기술 발전을 증가시킨다. 이는 사회적 혼란의 증가를 동반한다. 신자유주의적 형식에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자기 표현은 창조적 파괴의 힘을 해방시키고, 영원히 가속하는 기술적·사회적 혁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2. 철학자 닉 랜드(Nick Land)는 자본주의적 속도만이 견줄 수 없는 기술적 특이점을 통해 전지구적 전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근시안적이지만 매혹적인 믿음을 품은 채, 이를 가장 예민하게 포착해내었다. 이 같은 자본의 전망에 따르면, 인간적인 것은 그저 단순한 장애물일 뿐이다. 이전 문명의 브리콜라쥬된 파편으로부터 빠르게 구성될 전지구적이며 추상적인 지능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닉 랜드식의 신자유주의는 속도와 가속도를 혼동한다. 우리는 빠르게 갈 수 있지만, 쉽게 동요하지도 않으며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매개변수 안에서만 그러하다. 우린 단순하고 우둔한 돌진처럼 국부적 지평에서 속도의 증가를 경험한다. 보편적인 가능성의 공간에서 탐색적이며 또 실험적인 과정으로서 가속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후자의 가속이야말로 우리가 본질로서 여겨할 것이다.

3.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했듯이, 더 나쁜 건 자본주의적 속도가 탈영토화하는 즉시 재영토화한다는 점이다. 진보는 잉여가치, 노동 예비군, 부유하는 자본의 틀에 구속된다. 근대성은 경제 성장의 통계적 척도로 축소되고, 사회적 혁신은 공동체적 과거에서 가져온 키치적 유물로 꾸며진다. 대처-레이건식의 탈규제는 빅토리아 시대의 '기본으로 돌아가자' 식의 가족적이고 종교적인 가치와 편안하게도 동석한다.

4. 신자유쥬의 내의 보다 심층적인 긴장은 그 자기 자신을 근대성의 매개물로서 그린다는 점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를 문자 그대로 근대화의 동의어로서 여기며, 구성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미래를 약속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창의력을 가능케 하기보다 인식적 독창성을 제거함으로서 발전해왔다. 세계 공급 체인과 아시아의 신포드주의적 생산 지역에 짝을 이루는 정형화된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정동적인 생산라인의 입맛에 맞춰서 말이다. 엘리트 지식 노동자 같은 소수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는 매년 사라져가고, 이는 알고리즘 자동화 바람이 감정 노동과 지적 노동의 영역에 불어닥치면서 더 심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를 역사적 발전에 필연적인 자리로 위치짓지만, 실제론 1970년대에 가치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불가피하게도 신자유주의는 위기의 극복이 아니라 위기의 승화였을 뿐이다.

5. 닉 랜드와 더불어, 맑스 또한 전형적인 가속주의 사상가였다. 일부 현대 맑시스트들의 매 똑같은 비평이나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우린 맑스 자신이 그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또 변화시키기 위해 당시 가장 선진적인 이론적 도구와 실증적인 데이터를 사용하고자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근대성에 저항한 사상가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모든 착취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가장 진보된 경제 체제임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분석하고 간섭하기 위해 노력한 사상가였다. 자본주의의 성취들은 역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약을 넘어 그 가치 형태를 가속해야 한다.

6. 실제로 레닌마저도 1918년의 저작 <좌익의 유치함>에서 이렇게 썼다:

"사회주의는 현대 과학의 최신 발견들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대규모 공업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수 천 만 명의 사람들이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일된 표준을 엄격하게 준수토록 할 계획된 국가 조직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 맑시스트들은 언제나 그렇게 말해왔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아나키스트들과 당 내 거의 절반에 이르는 좌익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설명하려고 2초도 낭비할 수 없다."

7. 맑스가 알고 있었듯이, 자본주의는 진정한 가속의 행위자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술적 가속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좌파 정치를 평가하는 것 역시 적어도 이 부분에선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정말 정치적 좌파가 미래를 얻고자 한다면, 이 억눌린 가속주의적 경향을 최대한 수용해야만 할 것이다.

 

 

03. 선언: 미래에 관하여

1. 우리는 오늘날 좌파의 가장 중요한 분열이 전통적 좌파가속주의 정치라고 불려야 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 있다고 믿는다. 전통적 좌파는 지역주의, 직접행동, 끊임없는 수평주의를 견지하는 한편, 가속주의자들은 추상성, 복잡성, 전지구성, 그리고 기술이라는 근대성을 편안하게 느낀다. 전자는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작고 임시적인 공간을 확립하는 데 만족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비지역적이고, 추상적이며, 우리 일상의 토대에 뿌리깊게 박힌 적들과 마주할 때 수반되는 진짜 문제들은 회피한다. 이런 정치의 실패는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반면, 가속주의 정치는 후기 자본주의의 성과는 보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그것의 가치 체계, 통치 구조, 집단 병리가 허용하는 것 너머로 더 나아가고자 한다.

2. 우리 모두는 더 적게 일하길 바란다. 이는 흥미로운 질문인데, 전후 세대의 선도적인 세계 경제학자들은 계몽된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노동 시간의 획기적인 감소를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케인즈는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1930)라는 저작에서 개인의 노동시간이 하루 세 시간으로 줄어든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견했다. 그 대신에 일어난 건 일이 사회라는 공장의 모든 측면에 침투하면서, 일과 삶의 구분이 점진적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3. 자본주의는 기술의 생산력을 제약하기 시작했고, 아니면 적어도 불필요하게 협소한 목표들을 향하도록 지시했다. 특허 전쟁과 아이디어 독점화는 동시대적 현상으로, 경쟁 너머로 가고자 하는 자본의 필요와 기술에 대해 심화되는 자본의 퇴행적 접근 둘 다를 가리킨다. 신자유주의의 철저히 가속적인 성과는 적게 일하고 적게 스트레스 받는 걸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 여행, 미래에 대한 충격, 혁명적인 기술적 잠재력의 세계가 아니라, 발전하는 유일한 것은 조금 좋아진 소비 제품일 뿐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의 가속을 희생하여, 동일한 기초 제품들을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찍어내는 일이 미비한 소비 수요만을 지탱하고 있다.

4. 우리는 포디즘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포디즘으로의 회기는 가능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질서정연한 생산 패러다임을 전제로 한다. (남성) 노동자들이 사람을 우둔하게 만드는 지루함과 사회적 억압의 대가로 사회보장과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보장받았던 바로 그것 말이다. 이 시스템은 식민지, 제국, 미개발된 주변부라는 국제적 위계,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라는 국내적 위계, 그리고 여성 복속이라는 견고한 가족적 위계에 기대고 있다. 많은 이들이 향수를 느낄 순 있더라도, 이 체제는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사실상 돌아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5. 가속주의자들은 잠재적인 생산력을 해방하길 원한다. 이 기획에서 신자유주의의 물질적 플랫폼은 부숴질 필요가 없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재목적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토대는 박살나야 할 자본주의 단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이후를 향해 나아갈 발판이다.

6. 자본주의적 목표들에 대한 기술과학적 종속을 고려하면(특히 1970년대 후기부터), 우린 분명 근대의 기술사회적 조직이 뭘 할 수 있을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이미 개발된 기술 안에 아직 건드려지지 않은 잠재력이 있을지 우리 중 누가 완전히 알 수 있을까? 우리의 도박은 기술적·과학적 연구의 대부분에는 진정으로 변화를 가져올 잠재력이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있으며, 지금은 쓸모없는 특징들(혹은 전적응2))이지만, 근시안적인 자본주의 연합 그 너머로의 전환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있다는 점이다.

7. 우리는 기술적 진화 과정이 가속되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건 기술 유토피아주의가 아니다. 기술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충분하다고 결코 믿지 않는다.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사회정치적인 행동 없인 결코 충분하지 않다. 기술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으며, 둘 중 하나의 변화는 다른 하나의 변화를 가능케하거나 강화시킨다. 기술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가속화가 사회적 갈등을 자동으로 극복하게 한다는 근거로 논변하는 반면에, 우리는 정확히 사회적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 기술이 가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8. 우리는 어떤 포스트자본주의(post-capitalism)도 자본주의 이후(post-capitalism)의 기획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혁명 이후에 인민들이 그저 자본주의로 회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새로운 사회경제적 체제를 세울 것이라는 믿음은 잘해야 순진하고 나쁘게는 무지하다. 여기서 나아가 우리는 현존하는 체제의 인지적인 지도와 미래의 경제 체제에 대한 사변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발전시켜야 한다. 

9. 그렇게 하기 위해서 좌파는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가 가능케 한 모든 기술적·과학적 발전의 이점을 취해야만 한다. 우리는 수량화가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가능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도구라고 선언한다. 경제적 모델링은 ㅡ간단히 말해서ㅡ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적 연결망 분석, 행위자 기반 모델링, 빅 데이터 분석, 그리고 비평형적 경제 모델에서 발견되는 이 도구들은 현대 경제와 같은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인지적 매개물이다. 가속주의 좌파는 이 기술적 분야들에 대한 문해력을 갖추어야 한다. 

10. 사회의 어떤 전환이라도 경제적·사회적인 실험을 포함해야 한다. 칠레의 사이버신 프로젝트3)는 이런 실험적 자세ㅡ발전된 사이버네틱스 기술, 정교한 경제 모델링, 기술적 토대 자체에서 예시된 민주주의적 플랫폼을 융합한ㅡ의 상징이다. 비슷한 실험들이 1950-1960년대 소비에트 경제에서도 시행되었는데, 최초의 공산주의 경제가 마주한 새로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4)와 선형 프로그래밍을 채용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모두 궁극적으로 성공적이지 않았는데, 이 원인은 초기 사이버네틱스 기술자들이 가진 정치적·기술적 제약에서 찾을 수 있다.

11. 좌파는 사회기술적 헤게모니를 발전시켜야 한다. 관념의 영역과 물질적 플랫폼의 영역에서 모두. 플랫폼들은 글로벌 사회의 토대이다. 플랫폼들은 행동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기본적인 매개변수를 확립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선험적인 것을 구성하며 행동들, 관계들, 그리고 권력들의 특정한 집합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들이다. 현재의 많은 글로벌 플랫폼이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에 편중되어 있지만, 이는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 생산, 금융, 유통, 그리고 소비의 물질적 플랫폼들은 포스트자본주의의 목표를 향하여 다시 프로그래밍되고 재구성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것이다.

12. 우리는 직접 행동만이 이를 이루기 위해 충분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행진, 표지판 들기, 그리고 임시적으로 자주적인 영역을 만드는 것과 같은 관습적 전술들은 실질적인 성과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린 적어도 뭔가 했어"는 유효한 행동보다 자존감을 우선하는 이들의 구호일 뿐이다. 좋은 전술의 유일한 기준은 중대한 성공을 가능케 하느냐 아니냐에 있다. 우리는 특정한 행동 방식을 물신화하는 걸 그만두어야 한다. 정치는 갈등과 분열, 적응과 반적응, 전략적 방법에 대한 경쟁 같은 역동적 시스템의 일단으로 다뤄져야 한다. 이는 시간이 지나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적응하게 되면 서로 다른 정치적 행동 유형이 무뎌지고 비효과적인 것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권력과 실체들이 우릴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반격하는 방법을 배워감에 따라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술을 버려야 할 필요가 늘어나고 있다. 당대의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의 핵심 가까이에 놓여있는 건 부분적으론 이 시대 좌파의 무능력이다.

13. 절차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과도한 특권화는 버려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급진적' 좌파가 지닌 공개성, 수평성, 포괄성에 대한 물신화는 무능함을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 비밀성, 수직성, 배타성(exclusion) 모두 효과적인 정치 행동을 위해 나름의 자리를 가져야 할 것들이다. (물론 특권적exclusive인 건 아니어야 하겠지만.)

14. 민주주의는 그 수단ㅡ투표, 토론, 또는 의회ㅡ으로 단순히 정의될 수 없다. 진짜 민주주의는 그 목표ㅡ집단적인 자기 지배ㅡ로서 정의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회적, 기술적, 정치적, 심리적)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있으리란 점에서, 이는 정치를 계몽주의의 유산과 함께 배열해야 하는 기획이다. 전제적 전체주의의 중앙집권화나 통제할 수 없이 변덕스러운 창발적 질서의 노예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분산된 수평적 형태의 사회성에 더하여 집단적으로 통제되는 합법적인 수직적 권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계획의 명령(The commend of The Plan)은 네트워크(The Network)의 즉흥적인 질서와 짝지어져야 한다.

15. 우리는 이 벡터들을 구성할 이상적 수단으로써 그 어떤 특정한 조직을 제시하지 않는다. 필요한 건 ㅡ늘 필요해왔던 건ㅡ 조직들의 생태계, 권력의 다양성이며 그러한 상대적인 힘들이 서로 공명하고 피드백하는 일이다. 분파주의는 중앙집권화만큼이나 좌파들의 종말을 알리는 징후이며,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양한 전술(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 또한)의 실험을 계속해서 환영할 것이다.

16. 우린 세 가지 구체적인 중기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우린 지적 토대를 지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혁명의 몽 페를랭 소사이어티(the Mont Pelerin Society)5)를 모방하여, 이는 오늘날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쇠약한 이상들을 대체하고 넘어설 새로운 이데올로기, 경제적·사회적 모델들, 재화에 대한 전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는 그저 관념만이 아니라 관념을 심고, 구성하고, 퍼트리기 위한 제도와 물질적 경로들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에서 토대이다.

17. 둘째, 우리는 대규모 미디어 개혁을 이룰 필요가 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제공되는 겉보기엔 그럴싸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미디어 조직들은 탐사 저널리즘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을 소유하고 있으며 내러티브의 선정과 구성에 있어 여전히 중요하다. 이를 인민적 통제로 가능한 한 가까이 가져오는 일은 지금 제시된 상황을 무화시키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18. 마지막으로, 우리는 계급 권력의 다양한 유형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재정립은 조직적으로 형성된 세계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존재한다는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대신에, 흔히 불안정한 노동(precarious labour)이라는 포디즘 이후의 유형들으로 구성된, 부분적인 프롤레타리아트적 정체성의 이질적인 집합을 함께 묶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9. 집단들과 개인들은 이 각각의 일들에 이미 착수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론 불충분하다. 필요한 건 이 세 가지가 서로 피드백하고, 각각이 서로 더욱 더 효과적일 수 있도록 현재의 결합 방식을 계속 조정해나가는 것이다. 새롭고 복잡한 헤게모니, 포스트자본주의의 새로운 기술사회적 플랫폼을 만들어낼 토대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및 경제적 전환의 긍정적인 피드백 고리. 역사는 이것이 언제나 시스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전술과 조직들의 광범위한 집합체였다는 걸 보여준다. 이 교훈들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20. 이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가장 현실적인 수준에서 가속주의 좌파는 효과적인 새로운 정치 토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돈의 흐름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우린 생각한다. 거리의 조직체가 지닌 '인민 권력'을 넘어, 우리는 정부, 제도, 싱크탱크, 노동조합, 그리고 개인 후원자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야 한다. 우리는 효과적인 가속주의 좌파 조직들의 생태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이러한 자금 흐름의 위치와 이동을 고려해야 한다.

21. 우린 사회와 그 환경에 대한 최대한의 자기 지배를 가진 프로메테우스적 정치만이 전지구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거나, 자본에 대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 자기 지배는 초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충분한 정보만 주어지면 너무나 쉽게 지배되는 라플라스의 시계장치우주6)는 진지한 과학적 이해의 주제에선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이는 자기 지배를 원시적인 파시즘으로, 권위를 선천적으로 불법한 것으로 매도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포스트모더니티의 피로한 잔여물에 동조시키자는 게 아니다. 대신에 우린 우리 행성과 우리 종에 놓여진 문제들이 우리로 하여금 새롭고 복잡한 모습으로 자기 지배를 쇄신하도록 한다고 말할 것이다. 우린 우리 행동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한편, 확률적으로 가능한 결과의 범위는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복잡계 분석에 짝지어져야 할 건 새로운 형식의 행동이다: 이는 오직 행동의 과정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인데, 지리사회학적 수완과 정교한 합리성의 정치 안에서 우연적인 것들로 만들어진 실천을 통해 기획될 수 있으며, 즉흥적인 행동들이다. 복잡계 안에서 행동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한 귀추적7)인 실험의 형식.

22. 우리는 포스트자본주의를 위해 만들어진 전통적 논변을 부활시키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부정의하고 비정상적인 체제이며, 진보를 방해하는 체제이다. 우리의 기술적 발전은 자본주의에 의해 해방되어온 그만큼 억압되고 있다. 가속주의는 자본주의 사회가 부과한 한계들을 넘어 이러한 능력들이 해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이다. 현재의 제약을 뛰어넘고자 하는 운동은 단순히 합리적인 전지구적 사회를 위한 싸움 이상이다. 우리는 19세기 중엽부터 신자유주의적 시대의 여명까지 얼어붙어버린 꿈을 회복하는 것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구와 당장의 신체 형태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 확장하고자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탐구 말이다. 이런 전망은 오늘날 더 순수했던 시절의 유물로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우리 시대의 부족하다 못해 비틀거리는 상상력을 진단하고, 정동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활기 넘치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제공한다. 결국, 최소한에 그쳐있는 기술적 개량의 세계를 넘어 모두를 아우르는 변화로 이끌 수 있는 것ㅡ20세기 중반의 우주 계획들의 약속 어음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ㅡ은 가속주의 정치에 의해 가능해질 포스트자본주의 사회 뿐이다. 향해서. 집단적인 자기 지배와 이에 수반되고 가능해지는 완전히 생경한 미래 시대를 향해서. 자기 비판과 자기 지배라는 계몽주의 기획의 제거가 아니라 그 완수를 향해서.

23. 우리 앞에 마주한 선택은 심각하다. 글로벌화된 포스트자본주의냐 원시주의, 끊임없는 위기, 지구 생태계의 붕괴를 향한 지난한 지리멸렬이냐.

24. 미래는 구축되어야 한다. 미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붕괴되어왔으며 더 커다란 불평등, 갈등, 그리고 혼란이라는 저렴한 약속으로 축소되어왔다. 미래에 대한 관념 안의 이러한 붕괴는, 정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냉소자들이 우릴 믿게 하는 것처럼 회의주의적 성숙함의 신호라기보단, 우리 시대의 퇴행적인 역사 상태가 드러나는 징후적인 것이다. 가속주의가 밀어붙이는 것은 더 현대적인(more modern) 미래이며, 신자유주의가 태생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대안적 근대성이다. 우리 지평이 외부(the Outside)에 있는 보편적인 가능성들을 향해 풀어질 때, 미래는 다시금 균열을 내며 열어젖혀질 것이다.

 


 

1) 크누트: (995?~1035년)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를 포괄하는 북해 제국의 왕. 파도가 밀려오는 데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 자신의 땅을 깍고 발을 적시는 파도를 꾸짖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의 명령에도 불구에도 파도는 밀려왔고 크누트 왕은 무력함을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2) 전적응: 특정한 환경에서 적응된 어떤 기관이나 성질이 새로운 환경을 처했을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기능으로 적응성을 나타낸다는 개념. 즉, 만약 새로운 환경에 처한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진화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
3) 사이버신 프로젝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시대에 칠레에서 실행된 컴퓨터로 통제하는 계획경제 시스템. 수도 산티아고의 메인컴퓨터와 각지의 공장을 일종의 팩스(telex)로 연결하여 제어하려고 했다.
4) 사이버네틱스: 인공두뇌학. 생물의 자기 제어의 원리를 기계 장치에 적용하여 통신·제어·정보 처리 등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분야.
5) 몽 페를렝 소사이어티: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에 우호적인 이들이 만든 국제 단체. 1947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의해 조직된 회의에서 창립하였다.
6) 라플라스의 시계장치우주: 우주는 정교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시계 장치로, 모든 사건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 시점의 초기 조건을 알면 그 이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이론. 피에르시몽 드 라플라스는 한 에세이에서 이러한 물리적 결정론을 '악마demon'에 빗대어 표현한 바 있다.
7) 귀추적: 관찰결과를 토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추리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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